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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로시]포켓몬스터:썬문 1화

눈 주위가 시큰하고 뜨겁다. 잠든 채로 울기라도 했다는 건가.
겨우 눈을 뜨니, 무늬 없는 밋밋한 천장이 보였다. 등에 느껴지는 푹신푹신한 감촉 덕분에 내가 침대 위에 누워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이동도 성공한 건가. 나는 마지막에 침대에서 누워있지 않았으니까. 혹시나 싶어 누워 있는 채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역시 그 세계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더 이상 머리가 회전하지 않자(너무 울어서 멍해진 것 같다.) 그냥 누워있을까 생각해 봤지만 그렇게 태평하게 있을 여유가 없었다. 지금 상황을 알아보는 것이 최우선이기에 나는 곧바로 상체를 세우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종이가 발바닥에 눌어붙자, 나는 그것들이 찢어지지 않게 조심히 떼어냈다. 등이 땀으로 축축해서 겉옷을 침대 위에 던져놓았다. 시원한 공기가 티셔츠 안쪽을 말려주었다. 뭔가 바람 치고는 세지 않고 이상한 냄새가 난다. 
나는 방안을 빙 둘러보았다. 벽면에 부착된 은색 테이블 위에는 까맣고 번들번들하고 얇은 무언가가 올려져 있었다. 받침대로 받쳐져 있고 옆에는 검고 위로 둥글게 튀어나와있는(미치 '쥐'같다) 물건도 있었다. 
나는 창문 밖에 풀밭이 햇살에 금색으로 빛나는 것을 보며 정보 수집을 마쳤다. 
건물 등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마을과 동떨어진 곳 같다. 피부가 까만 아이들이 띄어노는 모습이 조금 멀리 있지만 분명하게 보였다. 다행히 사람들로 보인다. 올리브유 색인 내 피부와는 다르지만 분명하게 사람이라 칭할 수 있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평화로운 곳인 것 같다. 
내가 도착한 곳이 내전 중인 상황이거나,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는 갱단이 활개를 치는 곳이면 어떡할까
라고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던 나는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아직 방심할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고개를 돌리고 나무로 된 문을 발견했다.

방문을 열까? 아니, 너무 이른가? 창문을 통해 도망치는 방법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 순간, 방문 밖에서 무거운 발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는 이쪽을 향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큰 보폭. 무겁고 느린 발소리. 성인 남성. 등줄기가 서늘해지고, 나는 본능적으로 숨을 곳을 찾고 있었다.
잡히면 끌려가 버릴 것이다. 죽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머리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고. 
문 뒤에 숨으려는 순간, 내 예상대로 성인으로 보이는 남성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주 잠깐 당황하는 기색이 보였다.
나는 그를 빠르게 흩어보았다. 초록색 뿔테에 색이 옅은 선글라스. 무지개가 그려진 흰색 야구모자.
무릎을 조금 덮는 고무줄 바지. 그는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위에 흰 가운만 걸쳤다. 
팔뚝에 군데군데 난-어딘가에 긁힌듯한-깊지 않은 상처가 있어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먼저 말을 꺼냈다. 부드러운 인상에 나는 몸에 긴장을 풀었다.
"좋아 그렇다면, 일단 밖에 나가서 차차 이야기해 주겠니?"
역시나 말을 통하는 모양이다.


우리는 거실 한가운데에 놓인 원목 좌식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그는 투명한 유리컵에 플라스틱 통에 담긴 가루를 넣고 숟가락으로 내용물을 휘젓고 있었다.
통에 적혀 있는 건 글자가 맞지만, 읽을 수 없다.
그는 설탕을 넣은 쪽을 내게 내밀고 자신은 그 반대인 유리컵을 입에 가져갔다. 나는 컵을 양손으로 감싸듯 들고 살짝 입으로 가져갔다.
시원하고 달콤하다. 심한 갈증을 느꼈던 나는 단번에 그 음료를 들이켰다. 나는 처음 마셔보는 맛에 완전히 감동해 버렸다. 
"이거, 뭐라고 하는 거예요."
"아이스티라고 하는 거야."
"아이스티......"
나는 이토록 맛있는 음료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자 그럼 이야기해주겠니?"
그는 양손을 깍지를 끼고 턱을 괴었다. 
"어디서 왔는지, 왜 내 연구실 뒤쪽에 쓰러져 있었는지도. 그리고 부모님은 어디 계신지." 

의외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가슴을 찌르는 듯했다. 고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흘긋 쳐다보았다. 웃음기가 없다.
"그래, 말을 안 하겠다는 거구나."

내가 묵비권을 행사하자, 그가 말했다. 가출한 것이라 생각한 걸까.
입안에 남아있는 아이스티가 찝찝하다.
"아 참 그러고 보니 내 소개를 안 했구나. 나는 쿠쿠이. 이 지방에 포켓몬의 기술을 연구하는 박사란다."
포켓몬이 뭐지? 
그는 등 뒤에 작은 책꽂이에서 잡지를 하나 꺼내 클립으로 고정되어있는 페이지를 펴 나에게 보여주었다.
"이게 나야."
쿠쿠이씨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과장스러운 표정으로 엄지를 들어 올린 남자가 있었다.
그 옆에는 문자로 모이는 것이 열거되어있었지만, 전혀 읽을 수도 없고 규칙성도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말이라도 통하는 게 어딘가. 문자는 배우면 된다.

"그럼 너에 대한 것도 들어야 하지 않을까? 이름이나, 나이. 뭐 그런 것 말이야."
이름이나 나이라면 얼마든지 말해줄 수 있다. 나이를 말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던 그가 이름을 말할 때는 꽤나 놀란 듯하다.
이름 짓는 건 나라마다도 다르니까. 어쩌면 여기는 성(姓)
의 개념이 없을 수도 있다. 
"좋아"
쿠쿠이씨는 잡지를 소리 나게 덮었다.
"뭐, 사정은 나중에 차차 듣도록 하겠어."
나는 그제야 조금은 숨통이 틔었다. 생각할 시간은 주어졌으니까.
그때 갑자기 개가 짖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놀라서 몸을 떨었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아이보리색 털을 가진 작은 네 발 동물이 달려왔다. 그는 그 생물을 들어 올려 그의 품에 안았다.
"포켓몬스터, 줄여서 포켓몬이라는 거야."
아, 네. 하고 짧게 대답했다.
"몰랐구나?"
쿠쿠이씨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말문이 콱 막혔다. 그가 하는 말 하나하나가 얼어붙을 듯한 냉기로 바뀌어 내 몸에 달라붙었다.
위험하다. 의심받고 있다. 무엇을? 그건 모른다.
"....... 원한다면 당분간은 이곳에서 지내도 된단다."
그때 내가 얼마나 멍청한 표정을 지었을까. 기쁘다기는보다는 의심스러웠다. 왜? 이유가 뭐지? 나를 꼬셔서 팔아먹으려는 속셈인가?
"괜찮아. 너와 나이가 얼마 차이 안 나는 여자아이도 이곳에 살고 있거든. 어차피 갈 곳도 없는 것 같고, 선택지는 없을 텐데?"
이 사람, 정말로 내가 가출한 것이라 생각하는군. 차라리 그게 더 나으려나. 부모의 학대를 참지 못하고 소녀라고 하는 거야.

"네, 잘 부탁드려요."
쿠쿠이 박사는 내 대답에 미소를 띠었다.
어차피 갈 곳이 없다. 이 남자가 내가 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길 바랄 수밖에.


덧글

  • 2017/12/08 15:1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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